“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 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주권을 발탁하자 홍재설은 분연히 일어나 을사 늑약의 파기와 을사 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인 차관 통치를 시작하려 하자, 윤이병과 함께 동우회를 세워 본격적으로 반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총리 이완용의 집을 동지들과 함께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결국 체포되어 방화죄 및 내란 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이 주춤하던 1921년 11월 14일. 전남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생 수십 명이 정오에 울리는 오포 소리를 신호로 학교 정문을 박차고 나갔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들은 2㎞쯤 떨어진 목포 시내 중심가의 일본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로 진출했다. 독립의 염원을 가슴속에 숨긴 채 답답해하던 목포시민들도 어린 학생들의 장한 거사에 합세했다. 목포시민들은 2년 전 3·1운동을 떠올리며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엮어낸 빛나는 승리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제는 가혹했다. 대열을 막아선 경찰은 15~19살 여학생 11명을 주모자로 체포했다. 그 주모자 중 리더가 문복금 여사이다. 결국 10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이후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위의 이야기는 국가 보훈처,
국가 기록원 그리고 한국 민족 문화 대 백과사전의 기록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홍재설 열사와 문복금 여사의 직계 후손들이 현재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번
3.1절 100주년을 뜻깊게 기념하고자, 교회
내 독립 유공자의 직계 후손들을 찾고 있습니다. 증 고조 할아버님 혹은 할머님이 독립 유공자이신 분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주후 2019년 1월 13일
한석현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