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에 관하여
고영민 목사
지난
주 설교,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지?’를 듣고서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많은 주제이다 보니 질문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설교 중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은 아주 전통적이고, 정통적이고, 성경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오랫동안
‘죽으면
천국 간다’는 사후 천국행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보니 약간의 혼란과 의문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 합니다. “성도는 죽으면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육체는
땅에 묻힌다.
그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상태가 복된 천상의 상태(heavenly state)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된 상태라고 해도 임시
상태(interim
state)이다. 이 중간 상태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나타날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라는 최종 구원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최종 소망은 사후 세계(life after
death)가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희망은
‘사후
세계 이후의 세계’(life after life after death)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구원은 주님께서 계신
곳에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Your
Kingdom come.)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고, 신구약 성경의 마지막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Amen. Come, Lord
Jesus!)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경 지식과 설명이 필요하기에 여기서 더 자세하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회에 관련된 성경 본문이
나오면 그 때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전제해야 할 3가지를 여러분께 말씀 드리면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첫째,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후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무엇보다도 확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롬 5:8)입니다. 그 무엇도 끊어 놓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롬 8:38-39)입니다. 이것만 분명하면 우리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은 지금 죽으면 천국 갈 것을
확신합니까?’
이
질문보다
‘당신은
지금 죽어도 당신을 향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후 세계, 최종 부활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할 때에 확고하게 믿어야 할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죽으시고 삼일 만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일어날 일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확고하게 믿으면 많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사후 세계, 최후의 부활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초월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해도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낙원에 다녀온 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inexpressible
things)을
들었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말로 자꾸 설명하고 표현하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의 신비와 영광을 훼손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후 세계를
더 믿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만 말해야 하며,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질문도 상상도 멈추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그 누구보다도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겸손이 없으면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도 좋지만, 우리 앞에서 훨씬 더 좋은 세계, 그리고 가장 좋은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노래처럼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Is Yet To Come.) 이런 희망 가운데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마주하게 될 마지막 희망이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고,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 가운데 발견하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발현시키는 삶을 살면서 훨씬 더 좋은 세계와 가장 좋은 세계를 소망하는 삶입니다.
참고 - 장례 문화와 화장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바울은 우리가 죽은 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죽은 성도에 대해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만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부활의 소망 아래서 기독교의
장례 문화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장례의 기본 정신을 애도(mourning)와 경축(celebration)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애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 경축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장례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의 소망 아래서
진정한 기독교적 장례 문화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장례식이 장례식 같지 않은 장례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장례식 찬송가도 전형적인 장례식 찬양보다 영광과 감사의
찬송을 불렀으면 합니다. 장례식후 식사도 지상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식사 대접이기에 최대한 성대하게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화장을 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저는 여러 번 받았습니다. 전통적으로 화장은 힌두교나 불교의 장례문화입니다. 죽어서 자연으로 환원된다는 생사관가 관련이 있는 장례문화입니다. 부활을 믿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전통적으로 매장을 선호합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에서는
여전히 화장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토지 과밀 때문에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지금도 토지 면적이
엄청나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화장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저는 화장이 비기독교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저는 로마 제국 시대에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서 순교를 당한 성도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토지 과밀이 심각하지
않은 캐나다에서는 성도들이 매장 방식으로 선택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화장을 하게 될 경우에도 인간의 육체는 재가 되어서
자연에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서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고 영원히 살 것을 분명히 알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